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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칼럼] 절제와 생략이 빚은 미니멀조각의 원형
성정문화재단 조회수:225 218.155.17.102
2018-12-26 12:18:07

 

루마니아 태생 프랑스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의 파리작업실은 작품창고다. 어지러운 연장과 돌 부스러기, 석고조각하나 보이지 않은, 깨끗한 바닥에 완성품의 자태를 북쪽 유리창 지붕과 열려진 벽면 채광창으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햇빛에 빛나고 있다. <끝없는 기둥>과 <공간속의 새> <물고기> <입맞춤> 등등 부랑쿠시의 주옥같은 보물들이 가득하다. 1925년 자신이 찍은 흑백사진은 부랑쿠시의 수도사적 성격을 무심히 보여준다.
부랑쿠시는 성직자 같다. 플라톤과 11세기의 티베트 성자 밀라레파와 노자에 심취했던 그는 덥수룩한 수염과 깊은 성찰의 눈동자, 적당히 마른 수도자적 체형은 성직자의 내면을 보는 듯하다. 부랑쿠시는 고대 로마로부터 미켈란젤로를 경유하여 오귀스트 로댕으로 이어지는 이 오랜 구상 조각의전통과 결별하고 새로운 조각개념을 제시한 혁명적인 조각가였다. 그는 모든 형태 너머의 원형, 현상 너머의 본질을 움켜쥐기를 꿈꾸었고, 그 꿈에 값하는 작품들을 빚어 낼 수 있는 열정과 재능이 있었다. 그의 미감은 고뇌하는 예술가의 내적성찰과 오랜 세월 고단한 삶을 견뎌 피워낸 한 송이 꽃이었다.

 

파리의 꿈

브랑쿠시는 1876년 2월19일, 카르파티아 산맥과 다뉴부 강에 둘러싸인 루마니아의 시골에서 니콜라에 브랑쿠시의 6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이복형들의 학대, 카르파티아 산맥 기슭에서의 목동 생활, 대책 없는 무단결석 등으로 얼룩졌다. 일곱 살 때 더 넓은 세상에 대한 동경 때문에 가출했다가 모친한테 붙잡혀 집으로 끌려오기도 했던 그는, 1889년 13세 되던 해 다시 집을 나선다. 그것은 유럽 변방의 한 조그만 마을의 농부로 예정된 삶을 뿌리치고, 그가 자신의 운명에 내민 첫 번째 도전장이었다. 슬라티나를 거쳐 크라이오바로 간 그는 이후 수년 동안 술집 종업원, 식료품점 점원 등으로 일하며 독립적이긴 하지만 궁핍하고 위태로운 삶을 영위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심심풀이로 나무상자를 뜯어 만든 바이올린이 식료품점 주인의 눈에 띄어 손재주가 예사롭지 않음을 간파한 주인의 도움으로 크라이오바 공예 학교에 입학한다. 부쿠레슈티예술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 수학하고, 1902년 기술병으로 징집되어 2년 동안 인근의 마을에서 목수로 일하기도 하였다. 1904년 이제 스물여덟의 나이가 된 그는 루마니아 밖의 세계가 궁금했다. 좁게만 느껴지는 부쿠레슈티를 떠나 새로운 문화의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는 파리로 가는 것이 그에게는 꿈이었다. 마치 1970년대의 아메리칸 드림처럼... 그것은 유럽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가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부다페스트, 비엔나, 잘츠부르크를 거쳐 뮌헨에 도착하자 여비가 떨어지자 그는 파리까지 걸어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이 도보여행은 랑그르에서 중단되고, 완전히 탈진한 그는 파리에 사는 루마니아 친구의 도움으로 마침내 그 해 7월 14일 자신의 생애 전부를 예술로 바칠 파리에 도착하였다. 1905년 그는 루마니아 교육성의 장학금 지원을 받아 프랑스국립예술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조각가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부랑쿠시는 도핀느 광장 16번지의 6층 건물 꼭대기에 있는 자신의 다락방 벽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붙여 놓고 스스로를 격려했다. “네가 예술가임을 잊지 말라. 용기를 잃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넌 성공 할 것이다. 신처럼 창조하고 , 왕처럼 명령하고, 노예처럼 일하라.”.... ‘노예처럼‘ 작업하는 부랑쿠시의 모습에서 몸이 수고로운 예술가의 아름다운 노동을 본다.

 

새로운 형태

1907년, 부랑쿠시는 당시 구상조각의 대가인 로댕의 작업실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의 재주와 사람됨을 눈여겨 본 로댕은 부랑쿠시에게 자신의 조수로 들어와 작업할 것을 제의 받는다. 하지만 부랑쿠시는 ‘큰 나무 밑에서는 아무것도 자랄 수 없다’는 말을 새기며 단호하게 거절한다. 지금도 생각하면 대가였던 로댕에게 당시 무명의 루마니아 시골청년에게 주어진 행운 같은 기회를 거절하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부랑쿠시는 “사실에 접근할수록 죽은 형체를 만들 뿐이다”는 그의 말처럼, 로댕의 조각은 재현의 재현에 불과한 무의미한 작업이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과거의 재현에 머물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건 재현된 사실 그 너머 대상의 본질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 해에 루마니아의 유력 인사 미망인이 남편의 묘지에 세울 기념상제작을 의뢰 받아 부랑쿠시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어린 소녀상인 <기도>를 제작하였다. 이후, 불행한 정사 후에 자살한 한 러시아 여인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입맞춤>은 로댕이 구현하고 있는 사실주의 조각의 전통을 버리고 부랑쿠시가 독자적인 걸음을 내딛는 출발점이자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청춘 남녀가 눈을 맞대고 팔로 서로를 부둥켜안고 입술을 나누는 단순함에는 로댕의 <키스>와는 사뭇 다른 인간적인 따듯함이 물씬 배어난다.
1910년, 그의 조각은 더욱 단순해졌다. <잠자는 여신>은 달걀형의 두상을 옆으로 뉘고, 코와 입 그리고 눈을 부드럽지만 인상적으로 만들었다.
<잠자는 여신>은 그저 달걀처럼 생긴 둥근 타원 형체일 뿐이다. 만년의 그의 조각적 침묵 속에는 형태의 끝에서 맛보는 어떤 희열이 있다. 모든 형태는 기화되어 버리고 자신만 남아 더 이상 구현해 낼 형태도, 느낌도, 이미지도 없는 적막의 공간속에 들어갔다. ‘여신의 잠은 이러하다‘라고 천명하듯, 부랑쿠시는 부드럽고 편한 잠의 경지를 마치 잠에 취해 죽은 여인처럼 표현하였다. 이런 형태감은 모딜리아니의 달걀형 인물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부랑쿠시는 이러한 달걀 형태로 조각된 자신의 조각을 "눈 먼 사람을 위한 조각"이라고 불렀다. 부랑쿠시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공간속의 새>는 새의 비상을 극명하게 추상화한 명품으로 1926년미국전시를 위해 화물로 부쳤다가 뉴욕세관에 의해 기계부품으로 오인 받아 관세를 부과하자 소송으로 이어졌고 법정에서 되었다. 프로펠러처럼 보이는 반짝이는 예술작품이 기계부품과 구별이 안 되었을 법도 하다. 결국 재판에 이겨 작품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시대를 앞서간 지고지순한 정신성

1916년 파리 엥파스 롱상 거리로 작업실을 옮긴 부랑쿠시는 손수 만든 가구들과 작업대가 놓인 천장이 높고 채광이 잘 되는 밝고 환한 방에서 그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하얗게 차려입고 어떤 절대적인 평정과 조화 속에 잠 긴 채 수도자적인 엄격함으로 작업에 몰두하였다. 조각가로서의 그의 일생은 그 ‘정신의 섬광’을 포착하려는 지난한 도전과 실험의 역사였다. 그는 그것을 위해 끝없이 형태를 단순화 시켰고, 그리고 마침내는 형태를 지워 버렸다. 절제와 생략이 만든 미니멀아트의 원형이었다.
검소하고 근면한, 턱수염을 길게 기른 이 성직자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면서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사랑하고, 조국 루마니아와 루마니아 민속음악을 사랑하고, 아마추어 사진가로서 사진가 만 레이에게 사사 받아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운영하는 뉴욕의 사진 분리파 갤러리에서 사진개인전을 열기도 하였다. 1916년 루마니아 민병대와 독일군이 맞서 싸운 지우 강 전투를 기념하여 루마니아 정부의 의뢰로 1938년 완성한 <끝없는 기둥>은 20세기 조각의 정점이자, 루마니아 국민들의 가슴에 ‘콘스탄틴 브랑쿠시‘라는 이름을 깊게 각인시킨 불후의 명작이다.
1952년, 부랑쿠시는 프랑스로 귀화하면서 80여점이 넘는 조각품과 자신의 작업실을 파리국립현대미술관 퐁피두센터에 기증하고, 1957년 3월 16일 ”나의 인생은 기적의 연속이었다.”라고 술회한 부랑쿠시에게 더 이상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파리 몽파르나스 그의 묘지에 서 있는 <입맞춤>은 오늘도 영원히 사람들과 입맞춤하고 있다.

 

글 : 최선호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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