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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칼럼] 식민지 시대의 우울한 초상 : 구본웅
성정문화재단 조회수:178 218.155.17.102
2019-01-10 13:18:26

                                                                                                              <정물> 1927, 캔버스에 오일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시인 이상(李箱1910-1937)의 초상을 그린 곱추 화가
구본웅(具本雄1906-1953)을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럴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하하. 구본웅은 평생의 친구이자 천재인연의 끈이었던 암흑기 고독한 지성 이상의 빛나는 시선을 거침없이 화폭에 올렸다. <친구의 초상>은 이상의 얼굴이다. 폐병으로 얻은 창백한 피부에 광기마저 서린 가늘고 긴 눈, 그 속에 희미하게 서린 절규의 핏발과 거친 턱수염, 칙칙한 배경과 두꺼운 외투 아무렇게나 덮어쓴 모자, 굵은 파이프 담배연기 사이로 문학과 인생과 고독 그리고 절망을 오가던 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이다. <친구의 초상>은 식민지 시대의 우울한 내면과 가학적이고 고뇌에 찬 지성의 초상이다. 구본웅은 이상의 외모를 통해 자학과 조소로 가득한 자신의 내면풍경을 극명하게 표출하였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로 시작하는 이상의 시 <오감도(烏瞰圖)>처럼 난해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은, 다만 거칠고 광기어린 이 초상은 구본웅의 대표작이 되었다.

 

시대의 슬픈 자화상
구본웅은 1906년 3월 7일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서 해방 후 유도회 총본부회장을 역임한 구자혁(具滋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상산(商山) 김씨는 산후병에 시달려 핏덩이 아들 구본웅을 데리고 친정이 있는 황해도 연백으로 산후조리를 갔지만 그녀는 4개월 후 세상을 등지고 만다. 구본웅의 불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동네사람들에게 젖동냥을 다녀야 했고 허약한 체질로 어른들의 애를 태웠다. 세 살 무렵, 젖을 얻어 먹이고 집에 돌아와서 대청마루를 오르던 하녀가 등에 업힌 구본웅을 댓돌 위에 떨어뜨렸다. 돌 위에 떨어진 아이는 엄청난 충격과 아픔에 오랫동안 울음소리도 내지 못했다한다. 1년이 지나 아버지 구자혁은 아이의 척추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치료를 위해 서울 본가로 돌아왔지만 구본웅은 이미 치유 불가능한 곱사등이가 되었다는 진단을 받는다. 훗날 동경유학을 하고 유럽의 인상파화풍과 새로운 화풍을 접하면서 알게 된 파리 몽마르트의 화가 뚤르즈 로트렉(Toulouse Rautrec 1864-1901)도 어려서 넘어져 부러진 다리가 성장장애를 일으켜 난장이가 되었고, 불구의 뒤뚱거림 속에 겪었던 세인의 따가운 시선을 그림으로 승화시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구본웅을 ‘조선의 로트렉’이라 불렀는데 과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구본웅은 경신고보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의 세계에 입문했다. 구본웅이 경신고보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이상도 바로 이웃한 보성고보에 다니며 그림에 빠져들었다. 구본웅은 토요일에는 서양화로 일가를 이룬 고희동이 이끄는 YMCA의 고려화회에 나가 그림을 배웠다. 그는 1925년부터는 조각가 김복진에게 사사하며 회화와 함께 조각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1927년 5월 열린 제6회 조선미전에서〈얼굴 습작〉이란 조소로 특선에 올라 화단의 주목을 받은 구본웅은 이듬해 도쿄로 유학을 떠나 가와바타(川端) 미술학교에 입학했고, 다음 해 봄 일본대학 예술전문부로 옮겨 미술공부를 계속하였다.

구본웅의 그림은 당시 동경유학생들의 통과의례인 인상파를 넘어 세잔과 마티스 화풍이 가미되고 피카소의 큐비즘까지 등장하는 진취적이고 대담한 화풍을 만들어 갔다. 이상의 초상은 시인 박인환(1926-1956)이 6.25 전쟁 이후의 황폐한 삶에 대한 절망과 허무에 빗대어 쓴 시 <목마와 숙녀>처럼, 예술이든 문학이든 인생이든 사랑의 진리든, 그 모든 것들이 떠나든 죽든,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바람에 쓰러지는 술병을 바라다 보아야하는 식민지 불행한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하였다.

                                       <여인상> 1940년대, 나무에 오일

 

구본웅과 이상의 우정
구본웅과 이상은 어릴 때부터 경복궁 서쪽 인왕산 아랫동네에 이웃해 살던 신명보통학교 동기동창이다. 이상보다 네 살 많은 구본웅은 몸이 불구이고 약해서 보통학교를 다니다 말다하는 바람에 이상과 같은 반이 되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꼽추인 구본웅을 따돌렸다. 그러나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학생이 있었다. 항상 외롭고 우울해 보이는 이상(본명 金海卿)이었다. 당시에 동급생 중에는 구본웅보다 몇 살이 더 많은 학생들도 있었다. 그래서 같은 학년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던 이상은 젖비린내 나는 아이로 취급 받았으며 적지 않은 급우들에게 존대어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 많은 학생들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기 때문이다.
이상은 난해하기로 유명한 시 <오감도>와 소설 <날개>등의 작품으로 한국 근대문학을 황홀하게 했다. 하지만 그가 화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상은 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931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자화상>을 출품하여 입선까지 했다. 이 입선작은 이상이 ‘제비다방’을 개업했을 때, 구본웅의 <나부와 정물>과 함께 벽에 걸려있었다. 이상은 <친구의 초상>도 제비다방에 나란히 걸어두었다. 두 사람은 마음이 통해서 의기투합했지만 외모는 확연히 달랐다. 구본웅은 꼽추로 작은 키에 인버네스 외투는 땅에 질질 끌리었고, 이상은 키가 크고 비쩍 마른데다가 까치집 같은 머리에 얼굴이 희고 털 복숭이 수염천지인데 겨울에도 흰 구두를 신고 다녔다. 두 사람이 걸어가면 동네 꼬마아이들이 곡마단의 서커스 홍보를 하는 줄 알고 그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하지만 구본웅과 이상의 우정은 각별했다.

                                                                       구본웅 사진

 

이상이 경영했던 '제비'다방이 문을 닫은 뒤 새로 인수한 인사동의 카페 '쓰루' 경영에도 실패하는 등 연이은 사업 실패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을 때도 도와주었고, 1936년 10월 이상이 그토록 갈망했던 도쿄에 갈 수 있었던 것도 구본웅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제비'다방이 파산하고 집달리가 기물들을 거리에 내놓고 건물의 출입구를 봉쇄하기 직전, 1931년 '선전(鮮展)'에서 입선한 이상의 십 호짜리 이상의 <자화상>을 떼어내 자기 화실로 옮겨 보관한 이도 구본웅이었다. 이상의 아내이자 훗날 수화 김환기의 아내인 김향안(본명 卞東琳)도 구본웅의 소개로 이루어졌다. 당시의 그들의 관계가 복잡하다.

구본웅의 계모 변동숙은 그녀의 아버지 변국선의 본부인 소생이고, 여동생 변동림은 소실소생으로 나이가 26세나 차이가 났다. 자매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변동림이 폐병이 심한 6살 연상의 이상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 구본웅의 계모이자 언니인 변동숙은 극구 만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동림은 이상과 결혼하였고, 6개월도 안되어 동경에서 남편 이상이 폐병으로 죽는다. 훗날 화가인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와 재혼한다고 했을 때, 언니 변동숙은 동생의 머리채를 잡아 뒤흔들 정도로 그들의 혼인을 극력 반대했다. 이에 흥분한 변동림은 변씨 가문과 인연을 끊겠다며 김향안으로 이름을 바꾸고 김환기와 동거에 들어가 몇 년 후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경기여고와 이화여전 영문과를 중퇴한 변동림은 엄청난 소설 애독자로 구운몽 삼국지 등을 거의 외울 정도로 수십 번 탐독했고, 뛰어난 기억력과 유창한 화술을 구사하는 재원으로 재주의 탁월함에 언제나 탄복할 정도였다고 한다. 변동림은 누가 무어라 해도 시대의 인물이었다. 구본웅의 딸이자 발레리나 강수진의 어머니 구근모는 “불구의 몸이었던 선친이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실내에서 그림을 그리던 모습이 어린 눈에도 그렇게 좋아 보일 수가 없었다”고 회상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동경과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세 자매를 모두 예술가로 키웠다고 한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예술가의 피가 세계적인 발레리나로 꽃피우게 하였나보다.
1953년 정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피난지 부산에서 가족을 남겨두고 혼자 상경한 구본웅은 서울의 신문사에서 삽화를 그리며 새로운 그림에로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던 가운데 2월 2일 종로구 누하동 자택에서 허약해진 몸과 꼽추로 얻은 약한 폐기능이 급성폐렴으로 이어져 48년의 고단하고 암울했던 화가의 일생을 마감한다. “...나는 걷든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한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ㅅ구나, 한 번 더 날아 보자ㅅ구나.”는 <날개>의 마지막 대목처럼, 구본웅은 평생을 지고 살았던 꼽추의 멍에를 내려놓고, 한국근대개화기미술의 날개가 되어 하늘높이 날아올랐다.

 

글 : 최선호(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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