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문화광장 새소식

새소식

게시글 검색
[아트 클래식] 20세기 뉴욕팝아트의 슈퍼스타
성정문화재단 조회수:61 27.119.72.251
2019-01-16 14:33:21

 

                                                    -마릴린먼로                                        

 

1950년대로 접어들면서 예술의 중심지는 더 이상 파리가 아니었다. 세계 유

수의 미술관과 유명 화랑들이 뉴욕에 다투어 들어섰고, 이곳에서 세계 미술품

가격을 결정 하였다. 윌리엄 드 쿠닝과 잭슨 폴록, 마크 로스코 등으로 대표되

는 미국의 소위 추상표현주의가 성공을 거두면서 세계미술의 선두주자 위치

를 굳건히 지키던 유럽은 뉴 욕으로 그 자리를 내 주어야만 했다. ‘예술이 곧

삶이고, 삶은 예술이다’를 모토로 내건 팝 예술가들은 일상소품에서 조형 모

티브를 찾았고, 앤디 워홀은 그 중심에 서 있 었다. 앤디 워홀(본명은 Andrew

Warhola)은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에서 체코슬로바키아계의 가난한 이민가

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전직 광부였고, 어린 워홀은 2차 세계대전의 불안

과 경제적 암울함 속에 도시의 소외된 빈민구역에서 기죽고 소심한 소년으로

자랐다. 비위생적이고 소란스러운 좁은 골목과 널린 빨래 때문에 창문이 보이

는 날이 없는 낡은 집. 하얗게 야윈 얼굴의 소년 워홀은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

서 자아를 형성해 나갔다. 초 등학교 시절부터 워홀의 그리기 능력은 남달랐

다. 워홀의 재능을 간파한 선생님은 그가 카네 기 미술관에서 주관하는 미술

강좌를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스타의 꿈

워홀은 1945년 피츠버그 카네기 멜론 공과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1947년 단돈 200달러를 들고 뉴욕으로 향한다. 뉴욕에서 몇몇 광고 잡지에

일러스트를 선보인 뒤 기발한 콘 셉트와 기법으로 주목을 끌기 시작하여 오

래지 않아 <보그> <하퍼스 바자> <뉴욕커> 같은 대형 잡지사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하게 된다. 초기의 일러스트 중에서 널리 알려진 그림으로는 일 련

의 구두 그림을 꼽을 수 있다. 잉크 얼룩을 느슨하게 이용한 그 드로잉은 워홀

을 단번에 유명 인사로 만들었다. 그는 여러 상을 거머쥐고, 1956년에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드로잉 작 품이 전시되는 영광을 안았다. 그의 나이

과 28살 때의 일이다. 하지만 워홀의 꿈은 디자이 너가 아닌 순수 화가였다.

그를 세상에 알리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실크스크린 기법의 대량 복제 화였다.

그것은 캔버스 위에 코카콜라나 캠벨 수프 같은 일상의 상품에서부터 할리우

드의 스타 마릴린 먼로와 존 F. 케네디와 부인 재클린 케네디 등 명사들을 캔

버스 위에 옮겨 산업사회의 대량생산과 소비를 냉소적으로 풍자한 작품이었

다. 워홀은 이런 이미지를 한 번에 수백 점씩 대량으로 찍어내었다. ‘공장에서

제품 찍어내듯이’ 찍어내는 그의 실크스크린 작업은 엄청난 반 향을 일으켰

다. 스타가 되고 싶은 워홀의 꿈이 한 발짝 더 가까이 실현되고 있었다. 평소

워홀은 “훌륭한 그림에 관한 나의 아이디어는 유명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

는 것이다”라 든가 “미국이 기가 막히게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가장 부자

도 가장 가난한 사람도 똑같은 물건을 살 수밖에 없는 전통을 만들었다는 것

이다. 누구나 텔레비젼을 볼 수 있고 누구나 코카콜라를 마실 수 있다. 대통령

도 리즈 테일러도 코카콜라를 마신다.”라는 말을 했다. 또 “나는 매일 같은 일

을 한다. 내 일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리고 최대한 많이 그림을 생산하도

록 노력한다.”는 말도 남겼다. 이런 말들로 표현된 그의 예술관은 그가 전 미

국을 들썩이게 하고 나아가 세계적 스타가 되게 한 최고의 자산이었다.

                                -코카콜라

 

워홀의 실크스크린

워홀은 1950년대 말 이미 뉴욕 최고의 상업디자이너로서 명성을 누리더니

디어 1957년 29세의 나이로 ‘앤디워홀 엔터프라이즈’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워홀은 맨해 튼 작업실에서 캔버스에 실크스크린 기법을 이용하여 다양한

티브를 캔버스에 담 기 시작한다. 끔찍한 교통사고 현장이나 해골,

전기의자가 등장하기도 했고, 마릴린 먼로나 리즈 테일러,제임스 딘, 엘비스

프레슬리도 즐겨 채택하는 모티브가 되었다. 뉴욕타임스에서는 연일 스타들

의 사생활이 보도 되었다. 제임스 딘의 요절, 리즈 테 일러의 지병과 여러

명의 남편, 마릴린 먼로의 죽음 등이 워홀에게는 모두 작업의 훌륭한 모티브

였다. 한편, 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 돈이라는 주제는 워홀에게도 흥 미로운

대상이었다. 홀은 여러 가지 돈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캔버스에 가득 2달

러 지폐 이미지를 실크스크린기법으로 섬세하게 표현하는가 하면,

<코카콜라> 병이 나 <캠벨 수프> 깡통의 이미지를 통해 미국 문화의 단면을

투영하기도 하였다. 워홀의 실크스크린 작업은 그의 든든한 인적 구성으로 더

욱 발전하게 되었다. 워 홀의 어머니 줄리아 워홀라는 인쇄된 실크스크린에

아들 워홀 대신 사인을 하였고, 조수인 네이선 글럭은 프로젝트 수주를 담당

했다. 작업실에 놀러온 친구들과 손 님들도 동원되기도 하였는데, 워홀은 이

들을 ‘컬러링 팀’이라고 부르며 인쇄물의 색 상 작업을 맡기기도 하였다. 워홀

은 ‘오리지널’이라는 개념에 크게 고민하지 않은 듯하다. 그 일례로 고객 증정

용 판화 <샘이라는 이름의 고양이 스물다섯과 푸른 고 양이 하나>를 제작했

는데, 모두가 앞쪽 특정번호를 원하자 작품 전체에 같은 에디 션 번호를 매겨

이 화보가 몇 권이 나왔는지 아무도 모를 정도였다. 예술작품 컬렉 터들은 유

일한 작품을 소유한다는 자부심을 갖게 마련인데 워홀은 이마저도 무시한 새

로운 도전을 한 것이다.

 

 

워홀의 ‘팩토리’

워홀은 1965년 뉴욕 맨해튼 남쪽 231 이스트 47번가 5층의 넓은 작업실로 이

사한다. 워홀은 이곳을 ‘팩토리(Factory)’라고 이름 짓고 다양한 예술가들을 불

러 모아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 낸다. 이 공간은 작업실이면서 영화촬영장, 주

거공간이기도 하였다. 팩 토리에는 매일 새로운 인물들이 드나들었고, 워홀은

자신만의 독특한 패션코드가 필 요했다. 워홀은 어린 시절, 유전병인 신경질

환을 자주 앓았고, 색소결핍증으로 피부와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해버린 탓에

일찍부터 은빛 가발을 썼다. 검은 색 폴라 스웨터에 청바지와 가죽점퍼, 선글

라스 등은 워홀의 이미지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됐다. 특히 워홀의 가발은 후

에 자화상 시리즈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기도 하였다. 워홀은 웬만해서는 참석

할 수 있는 범위의 모든 파티와 대중적인 사건을 놓치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때로는 대역을 통해 등장하길 좋아했다. 첫 번째 사건은 워홀이 <첼시의 소녀들>로 영화제작자로서 상업적 성공을 거둔 것을 축하하기 위한 행사 였고, 두

번째는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몇 차례 강연을 마친 후였다. 점차 지루해 진 그

는 앨런 미첼에게 자신의 대역을 맡기고 해야 할 일들을 넘겨주어 워홀 행세

를 하도록 하였다. 워홀다운 이 두 사건은 결과적으로 큰 소동을 일으켰다. 워

홀처럼 보이기는 아주 쉬웠다. 이를 위해 워홀은 자신의 대역을 머리부터 발

끝까지 전형적 인 워홀패션으로 꾸미고 검은 안경과 은빛가발까지 씌웠다. 참

으로 앤디 워홀다운 발상이 아닌가. 앤디 워홀은 새로운 종류의 스타였다. 창

작자 제작자 배우를 겸했던 그는 우리에게 미술세계의 우상을 제공함으로써

세계를 풍요롭게 만들었다. 뛰어난 사업가이기도 했던 그는 정의하기 어려운

그의 재능을 매매함과 동시에 ‘팩토리’ 작업실에서 일 하는 18명의 조수들, 일

명 ‘소년들과 소녀들’의 대표자 역할을 통해서 자신을 매매 했다. 워홀은 “예

술은 근본적으로 금전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획득한다”라고 했는데 결국 사업

과 예술을 매혹적으로 결합하여 20세기 예술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팝 아트의 신화

워홀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1968년 6월 3일, 팩토리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

는다. 수 많은 워홀영화에 조연을 맡았던 극단주의적인 여성주의자 발레리 솔

라나스가 팩토리에 서 작업하던 워홀을 저격한 것이다. 워홀은 생명이 위독한

상태로 병원에 후송됐고, 뉴 욕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언론매체는 흥분에 휩

싸였다. <뉴욕포스트>는 1면 기사에 ‘앤 디 워홀, 위독’이라는 헤드라인과 함

께 희생자와 가해자의 사진을 나란히 실었다. 솔라 나스는 구속 후 정신이상

으로 진단받고 병원에 강제로 입원됐다. 범행 동기는 워홀이 영 화에서 여성

을 폄하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워홀의 부상은 점차 호전되었고, 9월에는 팩

토리에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건강을 회복했다. 하지만 부상의 후유증으로 평

생 코르 셋을 착용했고, 또 솔라리스가 자신을 암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워홀은 갈수록 쇠약해져 갔다. “나는 항상 기계이기를 바랐다”던 워

홀은 담낭질환을 앓고 있던 1987년 2월 자신이 제작한 <최후의 만찬>전시회

오프닝에 참석차 이 탈리아 밀라노로 향했지만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곧바

로 뉴욕으로 돌아왔다. 워 홀은 2월 20일 뉴욕종합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았

지만 합병증이 발생해 다음날 아침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앤디 워홀을 애도하

기 위해 뉴욕 세인트 패트릭 성당에서 열린 추모미사에는 2000여 명의 인파

가 몰려들었다. 죽음이 그를 덮쳤을 때 의심의 여지없이 앤디 워홀 자신은 팝

아트의 신화가 되었다. 그는 6개의 각기 다른 자화상 연작을 제작하면서 확실

한 슈퍼스타가 되었고, 1981년 미키마우스와 엉클 샘, 슈퍼 맨 같은 미국인의

신화 속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댓글[0]

열기 닫기

top